모든 것은 이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거야

스타리쉬와 그들의 작곡가인 유네, 하루카가 졸업 오디션을 패스하고 데뷔를 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12월 말. 송년회와 크리스마스, 데뷔 기념과 여러가지 이유가 겹친데다가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싶다며 관광 안내를 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토키야의 손에 이끌려 비행기에 올라탄 8명은 후쿠오카로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리타에서 후쿠오카 국제공항까지, 국내선이라 금새 도착하겠지만 이른 새벽부터 들떠서 복작대던 오토야, 쇼, 나츠키, 하루카는 이륙하고 몇 분만에 잠이 들었다. 난방을 충분히 틀었겠지만 창가 쪽에 앉아 추워보이는 하루카에게 제 담요를 덮어준 유네는 곤히 잠든 친구를 보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한편, 두사람의 앞 좌석에 앉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세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유네는 심심하던 차에 조심스레 앞좌석 시트에 몸을 기대 시선을 주었다. 렌이 능글맞게 웃으며 가운데 앉아있는 토키야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우리 6명까지 끌고 후쿠오카를 가는 이유가 뭐야? 잇치. "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많은 행사가 겹쳐서 다같이 기념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치노세에게 다른 목적이 있었구나. 뜻밖의 질문에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유네가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특별한 이유 같은거 없다고 얼버무리는 토키야에게 마사토가 맞받아쳤다. 

 

" 아니, 우리는 못 속인다 이치노세. 따로 해주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건가? "

" 그.., 그건... "

 

누구한테 뭘 해주는데, 하루카? 아님 오토야? 대상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는 전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유네는 속으로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부끄럼을 타는 거였는지 한참 우물거리던 토키야가 입을 열었다. 

 

" .... 어릴 적 추억이 있거든요. 아주 잠깐이지만 선명하게. 그 사람이 기억하지 못해도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요. "

" 잇치... 처음엔 그렇게 안봤는데.... 은근 로맨티스트 구나? "

" 로, 로맨...?! 그런거 아닙니다, 그동안 민폐도 끼쳤고, 누구보다도 감사한 사람이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할 예정이니까, 멋대로 장르 바꾸지 말아주세요! "

 

... 그런 거구나.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은지 유네는 앞좌석에서 몸을 떼고 제 좌석 등받이에 풀썩 쓰러졌다. 머릿속도 마음도 복잡하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더 좋았을 텐데. 

 

" 성공하길 빈다, 이치노세. "

" 그러니까 고백하는 게 아니잖아요! "

 

두 친구 사이에 끼여 얼굴을 붉게 물들인 토키야가 작게 소리치는 모습이 좌석 틈새로 얼핏 보였다. 그 모습에 가슴께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담으려 유네는 눈가를 짓눌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계속 이 연정을 부정하고 외면 했다면 좋으련만. 첫사랑을 시작하고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채 이대로 져버리는 걸까. 

 

왠지 이번 여행은 힘든 시간이 될 것만 같았다.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벨트를 다시 찬 그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꾹 눌러 덮었다. 

 

*

 

오전 01:32 .

- 하나오카 씨, 지금 주무시나요? 

- 아니, 잠이 안와서 산책이라도 할까 하고. 무슨 일이야?

- 아, 마침 잘 됐네요. 저도 산책할 겸 로비에 나와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 그럼 금방 준비해서 내려갈게. 잠깐만 기다려. 

 

뒷풀이를 마치고 전원이 지쳐 잠에 들어있는 상태에도 유네는 비행기에서의 일을 되짚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밀고 나오려던 찰나에 당사자에게서 온 연락에 유네는 하루카가 깨지 않도록 조용하고 빠르게 나갈 채비를 간단히 마치고 호텔 방을 나섰다. 

 

" 좋은 밤, 이치노세. 잠이 안와도 억지로 자려고 할 것 같았는데,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

" 아뇨, 그냥. 오늘은 잠시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여행이니까요. 그럼, 가실까요? "

 

어두운 호텔 로비를 나와 근처에 조그만 공원이 있다며 걸음을 옮기는 토키야의 뒤를 좇았다. 나란히 걸으며 눈오는 적막한 밤으로 채워진 거리에는 두사람의 발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 대화도 없이 그저 걷는 것에 집중하는 두사람 사이로 겨울바람이 스쳤다. 

 

" 저는 마실 만한 것 좀 사오겠습니다.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

" 아, 응. 다녀와. "

 

자판기 쪽으로 걸어간 토키야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이 공원은 왜 이렇게 밝은지 이유를 찾던 유네는 하얗게 빛나는 전광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견하고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높게 솟아오른 원뿔 기둥에 하얗고 파랗게 불빛이 반짝였다. 넋놓고 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토키야가 뛰어왔다. 

 

" 저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없어져서 놀랐잖아요. "

" 아, 미안. 트리가 너무 예뻐서... " 

" 정말이지... "

 

항상 조심하세요, 하고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친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푸스스 웃어버렸다.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 유네도 알겠다고 답하고는 트리를 보는 것에 집중했다. 토키야도 시선을 돌려 트리를 쳐다보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 이 트리, 엄청 예쁘죠. 어릴 적에 여기서 부모님을 잃어버렸던 것도 생각나네요. "

" 이치노세도 어릴 적엔 다 똑같았구나. "

" 그럼요. 그 때 그 경험이 인연인지, 10년 전 부터 이 날이 되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이 곳에 왔었어요. 추억을 되살리려. "

" 그랬구나... 나름 인간답네. "

" 뭐... 저를 인간답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 아니, 뭐든 척척해내기도 하고, 감정같은 거 갖지 않는 차가운 애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보면 어릴 적부터 훈련되어 있던 연기력이구나, 싶어. "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해명을 하는 유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고여있다. 그 모습을 잠시 빤히 쳐다보던 토키야가 살짝 떠보듯 유네에게 질문을 던젔다.

 

" 그러고보니, 하나오카 씨는 한번도 후쿠오카에는 안 와보셨어요? "

" 아니, 5살, 6살 즈음 이 시기에 한번 왔었... 어라? "

" 왜 그러세요? "

" 아, 아니.... 이 트리, 익숙하다 싶었는데 어릴 적에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

 

걸렸다. 살짝 미소지은 토키야가 유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그게, 진짜 어렴풋이라 기억은 잘 안나지만... 나 여기서 부모님 잃어버린 남자애를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 되게 예쁘게 생긴 내 또래 였는데... 도와주고 이름도 못 물어보고 그대로 헤어졌었거든. 조금 아쉽다~ 생각했었어 그 때. "

" 그래도, 10년 뒤에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않아요? "

" 그건 그렇... 응? "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고 토키야를 쳐다본 순간 어릴 적 봤던 그 남자아이와 얼굴이 똑같이 겹치자 유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어?! " 

" 기억 나셨나요? "

" 아니, 너 기억 하고 있었어?! " 

" 당연하죠, 그 때 하나오카 씨의 엉뚱한 돌발행동을 생각하면.. "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자 혼란스러운지 유네가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 그럼,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상대도... "

" 당연히 당신이죠. 설마 나나미 씨를 생각한 건 아니죠? "

" 내가 듣고 있는 거 알았어...?! "

" 이제와서 그렇게 일일히 놀랄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게 충격이에요? "

 

...... 세상에나. 지금까지 잔뜩 우울해하고 질투한 상대가 자기 자신이라니. 바보같은 몇시간 동안의 제 행동에 유네는 어이가 없단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어릴 적 추억도,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고싶은 상대도, 토키야에게 있어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란 사실에 안도감과 행복함도 함께 떠밀려왔다. 하지만 차마 질투했다, 라곤 말 할수가 없어서, 진심은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 준 뒤 말을 이었다.

 

" 그, 그럼.., 할 얘기라는건... "

" 네, 히지리카와 씨랑 렌이 고백으로 몰아가긴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감사하고, 죄송하고... 그래도 믿고 따라와주셔서 고맙다고. 그걸 전하고 싶었어요. "

 

웃으며 대답한 토키야는 차갑게 식은 유네의 손 끝을 부드럽게 감싸 들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춥게 입고 나온걸 인식했는지 작게 재채기를 하자, 토키야가 유네의 목에 제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 너도 추운데 나는 괜찮... "

" 아뇨, 그 때 보답이에요. 제가 멍하니 있다가 바람에 날린 목도리를, 당신이 주워서 추우니까 단단히 입으라면서 목도리 둘러줬잖아요. "

" 그런 얘기 해도 내가 그랬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는데.. "

" 어라, 그럼 더 얘기 해드릴까요? 갑자기 다가와서 제 손을 잡고 끌었던 당신이 어땠는지? "

" 아니.., 그 얘기는 그만... "

 

조금 따듯해진 손을 올려 토키야의 입을 막은 유네의 얼굴이 붉어졌다. 웃음을 지울 수 없던 토키야가, 제 입을 막은 손을 다시금 감싸 잡으면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 하나오카 씨. 당신이 저를, 저희를 구해주었어요.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그 생활에서도, 답이 없는 질문만 찾아 방황하던 그 날도, 전부. 저를 찾아 이끌어 준건 언제나 당신이었어요. 그리고, 믿어주신 대로.. 이제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 유네 씨도 그저... 지금처럼 그대로. 믿고 따라와주세요.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

" 이... , 토키야... "

 

갑자기 바뀐 토키야의 호칭에 당황하던 유네가, 붉어진 얼굴로 덩달아 이름으로 호칭을 바꿨다. 하고싶은 말이라면 이쪽도 많았다. 토키야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지긋 응시하던 유네가 대답했다.

 

" ...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건. 네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줬기 때문에, 노래하고 싶다는 그 마음으로 하야토로 데뷔해 내 꿈을 찾아주었다는 것도, 사오토메 학원에 입학해서, 같은 반 친구로서 곁에서 나를 믿어줬기 때문에... 나한테 여러가지를 가르쳐 줘서. 나도, 너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결국은... 네가 먼저, 나를 빛으로 이끌어 준거야. "

" ...솔직히, 졸업 오디션 때도 저를 선택해 주실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만... 저 혼자가 아니라 모두인 것엔 조금 심통이 나긴 했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스타리쉬 멤버와, 나나미 씨, 그리고 당신까지... 소중한 사람들과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

 

그 때, 돌연 새벽 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지고, 트리의 조명이 픽 꺼지자 주변이 암흑으로 들어찼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당황한 유네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급히 움직임을 막으려는 팔이 제 허리를 둘러싸는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 토..! "

" 쉿. 움직이지 마세요. "

 

심장소리에 점점 가속도가 붙는 걸 그가 눈치챌 것만 같아서 마냥 불안했다. 분명 눈까지 휘날리는 한겨울 일텐데, 그에게 안겨있는 탓인지 전신에 뜨거운 열이 그녀를 감쌌다. 아무 말이 없어도 유네가 당황해 하는걸 그대로 느낀 토키야는, 잡고있던 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제 입을 맞췄다. 

 

" 하지만.. 언제나, 제가 선택한건 당신 뿐입니다. 그건, 잘 알고 계시죠? "
" ....! "

 

귓가에서 나긋나긋, 작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반해 유네의 심장은 터질 듯 강하게 쿵쿵댔다. 그 모습을 캄캄한 시야 속에서 어렴풋이 본 토키야가 조금씩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 라니, 농담입니다. 조금 장난이 지나쳤나요? "

" 지나쳐도 이미 한참 지났거든...?! " 

 

너 진짜 자꾸 그 목소리 악용하지 말아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유네가 귀여워 토키야는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입니다. 언제나 제 곁에서 있어주실 거니까, 이런 경고같은 장난은 안쳐도 되겠네요. 그쵸? "

" 그게 경고냐...! "

 

하지만. 

 

" 조금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유네 씨. "

" 토키야도... 메리 크리스마스. " 

 

얼굴을 붉힌 채 입을 삐죽이면서도, 인사는 제대로 받아주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토키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이대로가 좋아. 

이대로 쭉, 

언젠가를 기약하며,

진심은 전하지 않은 채-

 

두사람만의 멜로디는 영원을 약속하는 기적으로-